일단 이 책을 보게 된 경위부터 이야기하자면, 경기도에서 지원하는 '독서포인트'로 쌓인 지역화폐를 사용기간 안에 소모하기 위해 2025년 말에 동네 서점을 찾아간 것이 발단이었고, 하필 거기에 이 엄청난 띠지를 두른 책이 비치되어 있었다는 우연의 결합이라 하겠습니다.

그날 전에는 이런 책이 나왔다는 사실 자체를 전혀 몰랐는데, 지자체의 독서 권장 정책이 비교적 올바르게 기능하여 나를 평소에 전혀 갈 일이 없었던 동네 서점에 들르게 만들지 않았다면 과연 내가 이 책을 만날 수 있었을까 하는 스스로에 대한 책망, 그리고 평소에 SF에 비교적 관심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출간 후 5개월이 되도록 여타의 경로를 통해 아무런 정보를 전달받지 못했다는 서적 홍보와 알고리듬에 대한 실망감, 그런 여러 생각들이 교차하게 만든 책입니다.

또 하나 고백하자면 이 책을 사고 나서도 최종적으로 완독하게 되기까지는 9개월의 시간이 더 흘러야 했는데, 그것은 책이 읽기 어려워서도 아니고 순전히 "언제든 읽을 수 있으니까" 라는 안도감에 '잡아놓은 물고기'를 뒤로 하고 여타의 다른 책들 - 이를테면 매주 반납해야 하는 동네 이동도서관 책들 - 부터 읽다가 우연찮게 다른 책들을 빨리 읽고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라는 너무도 하찮은 이유였습니다.

 

결국 하나의 책이 태어나서 독자에게 완전히 읽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시간낭비를 하게 되는가 하는 부분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는 최근에 스스로 책을 내어 본 입장에서 현실적으로 굉장히 피부에 와 닿게 절감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고, 또 그러한 시간낭비를 굉장히 후회하게 만들 만큼 이 책이 괜찮았기 때문입니다.

 


 

세 이야기를 하나로 엮는 연출력

 

일단 "엔트로피아"는 3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단편연작집입니다. 그런데 이게 겉에서 봤을 때 단편연작집이라는 아무런 단서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작품을 읽고, 또 책과 관련한 전후 사정을 찾아보면 이 책은 분명히 따로 따로 쓰여진 3개의 단편을 엮은 책이 맞습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단서가 없이 '장편소설'로 적혀 있는 것은 이 책이 전체적으로 세 이야기를 하나의 이야기로 더할 나위 없이 잘 결합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합, 본드 역할을 하는 것은 '선지자' 캐릭터인데, 이 선지자와 로마의 한 장군이 주고 받는 이야기가 세 개의 이야기를 하나로 묶고 절묘하게 풀어 나갑니다. (개별 단편들을 이렇게 하나의 커다란 흐름으로 엮는 방식은 제가 쓴 단편연작집 "환상조선록"에서도 매우 유사하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 작품을 읽을 때 더욱 동질감을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이 책의 제목 "엔트로피아"의 유래로 이어지며 마무리 됩니다.

 

이 선택에 대한 독자들의 호불호는 조금 갈리는 것 같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제법 괜찮았다"고 느꼈습니다.


개성 넘치는 독특한 아이디어의 단편들

 

한편 각 이야기들은 서로 결합하지 않고 단독으로 읽었을 때에도 그 매력이 충분히 차고 넘칩니다. 여러 이야기를 실은 단편집이라면 대개 한두 편 정도는 약간 '버리는(?)', 폼이 떨어지는 에피소드도 끼어 있게 마련인데, 이 책에 실린 세 개의 이야기들은 작가가 얼마나 고심하며 완성했는지가 확 느껴질 만큼 접근이나 완성도가 좋았습니다.

그래서 일단은 세 개의 단편 이야기에 대한 각각의 감상을 따로 한 뒤에, 그것을 하나로 묶은 또 하나의 이야기에 대해 마지막으로 감상을 남기는 것이 순서적으로 맞겠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 : "거란의 마지막 예언자"

 

멸망이 가까워진 요나라(거란)에서 말을 거꾸로 타는 수상한 자가 체포됩니다. 이자를 붙잡아 두고서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시간을 거꾸로 사는 선지자'임이 밝혀지는데... (정황상 로마 장군 앞에서 전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선지자 본인입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오래 살고 있는 것이기도 하죠.)

시간을 거꾸로 산다는 개념은 분명히 영화 "테넷"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작가 분이 올리신 영상에 의하면 이 작품의 아이디어는 2006년에 떠올린 것으로 "테넷"의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굉장히 골때리는 개념이기는 하지만 사람의 의식이 그렇게 흐를 수만 있다면 또 영화를 거꾸로 돌리는 것처럼 대단히 이상하지는 않고 그렇습니다.

하여간 그리하여 선지자를 통해 요나라의 멸망이 다가옴을 알게 되는 태자 차슈타이는 약간 절망에 빠집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로마의 장군 또한 같은 처지이지요. 허나 정해진 운명을 바꿀 수는 없음을 선지자는 역설합니다.

 

SF를 표방하는 작품임에도 첫 이야기를 로마나 요나라 같은 고대의 역사부터 시작하는 것도 굉장히 독특한 선택이라고 느껴집니다.

두 번째 이야기 : "책이 된 남자"

 

제5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인만큼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 다른 두 작품과는 달리 '시간'보다는 '정보'가 메인테마인, 대AI시대에 걸맞는 단편입니다. 최근에도 초파리의 뇌를 뉴런 연결구조?로 전자적으로 구현하여 화제였는데, 그러한 방법으로 중세 시대에 사람의 뇌를 책으로 변환시킨다는 발상을 재미있게 이야기로 풀어낸 작품입니다. (사람의 뇌를 계산식으로 풀어내려면 대체 얼마큼의 책이 필요할지가 조금 의문이긴 한데, 아이디어가 중요한 작품이니 그런 것은 의문시 하지 않기로 합시다. 지금 그게 중요해?)


작품 자체의 세련됨과는 별개로 '정보'에 대한 이야기인 이 작품이 전체 스토리에 어떻게 녹아들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작가는 연산이라는 틈을 통해 묘한 연결고리를 찾아냈습니다. 즉 '책이 된 남자'가 연산을 통해 외부와 상호작용을 하는데, 이 연산이라는 것은 현대적 컴퓨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십년 단위의 엄청난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외부의 시간이 '책이 된 남자'에게는 어떻게 느껴질까요? 이러한 사고 실험을 통해 '시간을 거꾸로 사는 선지자'의 시점 또한 존재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것이죠. 가능할까요?

 

세 번째 이야기 : "두 서울 전쟁"

 

전의 두 에피소드가 단순히 시간을 거꾸로 사는 선지자가 풀어놓는 이야기였다면, 마지막 에피소드는 드디어 본격적으로 '시간여행'이라는 컨셉을 다룹니다. 근미래에 시간여행이 현실화 되고, 여차저차 하다가 대한민국에 독재자가 출현하여 국내에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미래를 침략"하자는 놀라운 결정을 내리는, 정말이지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통상적으로 미래가 더 기술이 발전한 사회이기 때문에 이 결정이 다소 의아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 '산적한 문제'가 인구감소라는 점을 생각하면 독재자의 결정도 일리는 있어 보입니다.)

 

시간여행물은 역사가 깊은 만큼 여러 가지로 나뉘는데, 그 방식에 따라 여행자가 복제되어 자기 자신을 만나기도 하고 아니면 단순히 과거의 몸에 의식만 투사하는 경우도 있고 합니다. (의식끼리 싸우는 독특한 경우도 봤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일단 통상적인 물리적 시간여행을 택한 것으로 보이고, 그 결과 수많은 연도의 자기 자신들과 만나 회의를 하는 장면도 묘사됩니다. (작가 후기에도 나오지만 '릭 앤 모티'도 많은 참고를 하신 듯합니다. 저도 좋아합니다.)

시간여행의 방식을 나누는 또 하나의 기준이 되는 것이 "역사가 바뀔 수 있느냐" 인데, 이 작품은 첫 번째 이야기에서 먼저 "역사는 바뀌지 않는다"고 못을 박고 시작했습니다. 역사가 바뀌지 않는 부류의 시간여행물은 깝깝하고 짜기 어렵지만 결과적으로 예술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하지만 또 자신의 할아버지를 죽이든 뭐든 변화를 꾀할 수 있는 시간의 흐름에서 항상 어떤 논리적 허점이 존재하게 마련이죠. 이 작품은 결국 "어떤 극단적 조건을 충족하면 역사가 바뀔 수 있다" 라는, 하이브리드적으로 변화된 노선을 보여줍니다. (여기서도 호불호가 갈리는 듯한데... 아무튼 과거 시점에선 타임머신을 쓸 수 없으니 미래를 아는 것 만으로는 역사를 바꿀 수 없다... 라는 전개가 맞는 것도 같습니다.)

시간여행에 굉장히 큰 규모의 플랫폼이 필요해서 타임머신을 사적으로 마구 쓸 수는 없고 마치 철도를 예약해서 여행하듯이 해야 한다는 점도 이 작품의 특이한 점인데, 이것 또한 위의 설정에 영향을 주고 있어 보입니다.



좋은 소재와 접근 방법, 안정된 문체, 다양한 배경지식, 메인테마와 마무리까지, 전반적으로 어디 하나 흠잡기 어려운 좋은 책이었습니다. 김필산 작가님의 다음 작품도 무척 기대가 됩니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67471104

 

엔트로피아 | 김필산

김필산 작가의 『엔트로피아』가 허블에서 출간되었다. 김필산은 제5회 한국과학문학상 가작을 수상하며 등장한 신인 소설가로, 이 작품은 그의 첫 단행본이자 장편소설이다. 2200년 미래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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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감상 카테고리 신설  (0) 2026.09.30

Posted by 해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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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동네 이동도서관을 애용하고 있기도 하고, 출판업 관계자로서 전국민 독서 권장 운동에 일조하기 위하여 소설 감상 카테고리를 신설합니다.

 

현업 창작자의 입장에 서 있으므로 타 창작물에 대한 강도높은 비평은 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올라올 대부분의 감상평은 제가 지극히 만족한 작품들에 한하여 이루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또 비평이 필요할 때는 언제든 가감없이 하겠습니다. 결론 => 최근 읽은 책들에 대한 감상평을 올리겠다.

 

책을 읽읍시다! ('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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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연작단편집 <환상조선록> - 최가야 글 / 손장원 그림

 

오랜 기간 작업해 왔던 SF 퓨전 사극 장르의 단편소설 연작집 <환상조선록>이 2026년 2월 6일 출간되었습니다. 앙골모아랩의 첫 번째 종이책 출간입니다. :)

 

같은 장르의 전작 <공길동전>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작품으로, 손장원 작가님의 사이버 조선 일러스트들을 모티브로 진행된 프로젝트입니다. 자세한 내용 소개 등은 앙골모아랩 홈페이지를 참고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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